“무작위 배당이 원칙”이라며 ‘재판의 공정성’ 뒷전
‘이 많은 관련 법관 다 배척하겠나’는 식의 주장도
대법원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대법원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사법농단 사건을 재판할 특별재판부를 설치하자는 국회 움직임에 대법원이 반대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나섰다. 사실과 맞지 않는 주장을 펴거나, 사법농단 당사자 입장에서 특별재판부 구성을 반대하는 식이어서 반발과 논란이 예상된다.

대법원은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의원 56명이 지난 8월 발의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기간 중의 사법농단 의혹사건 재판을 위한 특별형사 절차에 관한 법률안’(특별재판부 설치법)에 대한 의견서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보냈다고 8일 밝혔다.

대법관 추천도 ‘외부인’ 참여하는데

대법원은 의견서에서 “1·2·3공화국의 특별재판부·특별재판소는 헌법상 근거가 있었으나 이 법안의 특별재판부와 특별영장전담 법관은 헌법상 근거가 없다. 또, 대한변협 등 법원 이외의 기관이 개입해 담당 법관을 정하는 것은, 헌법의 ‘법률이 정한 법관’에 해당하지 않아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헌법상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과 달리,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성된 특별재판부는 제헌헌법에 특별재판부를 둔다는 별도 규정이 없는데도, “일제강점기 법관으로 근무했던 이들이 공정한 재판을 하기는 어렵다”는 공감에 따라 만들어졌다. 16명인 당시 특별재판부에는 국회의원 5명과 시민사회 인사 5명도 참여했다. 이번 특별재판부에 헌법상 근거가 없다는 등의 대법원 주장이 그대로 통하기는 어려운 셈이다.

외부기관 개입을 문제삼는 대법원 주장도 억지라는 비판이 예상된다. 법안도 특별재판부 판사 등은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국회와 대한변협 등 법원 이외의 기관은 후보를 대법원장에게 추천하는 ‘특별재판부후보 추천위원회’의 위원을 추천하는 정도로만 개입할 뿐이다. 대한변협 회장 등이 추천위원으로 직접 참여하는 기존의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등보다 외부 기관의 개입 정도가 낮다. 그런데도 ‘법률이 정한 법관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재판의 공정성’보다 ‘무작위 배당’이 우선?

대법원은 또 “사법행정권의 핵심인 사무분담·사건배당은 법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특정사건의 배당에 관해 국회나 대한변협 등이 개입하는 것은 사법권 독립의 침해로 볼 여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정 사건에 맞는 적임자를 고르는 방식으로 재판부를 구성하는 것은 ‘사건 배당의 무작위성’에 위배되고 재판의 공정성에 관한 또 다른 시비를 불러올 수 있다”는 주장도 폈다.

이에 대해, 법안 발의자인 박주민 의원은 “무작위 배당은 어디까지나 공정한 재판을 위한 수단이다.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법에 사법농단에 직간접으로 관련된 판사들이 많은데, 그런 상태에서 무작위 배당을 하면 공정한 재판이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대법원은 의견서에서 “특별재판부가 구성되더라도 피고인들이 재판부 구성의 위헌성을 문제삼아 절차에 협조하지 않을 수 있고, 위헌법률심판제청으로 재판이 정지될 수 있어 재판의 공정성·신뢰도가 오히려 저하될 수 있다”는 의견도 밝혔다. 대법원은 또 “특별재판부 판사 임명에는 판사 본인의 동의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많은 판사들이 동의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도 주장했다. 어차피 할 사람도 없을 거라는 투다.

박주민 의원은 “법관도 공무원이니 추천해서 임명되면 ‘나 안 할래’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대법원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것이다. 협박으로까지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피고인의 입장에 서서 절차에 관해 있지도 않을 극한적인 저항과 항변 수단을 제시하는 등 과도한 반대론을 편다는 비판도 예상된다. 위헌법률심판제청은 재판부가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애초 없을 일이기도 하다.

대법원은 이와 함께 “이번 일이 선례가 되면 앞으로 정치적·사회적 논란이 큰 사건이나 법원 내부인사가 관여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특별재판부 설치를 요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 법률안대로라면 대법원장 권한만 강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법농단이 사법 사상 초유의 일이며 ‘사법농단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는 법관들이 공정한 재판을 하기는 어렵다’는 이번 사건의 특수성을 애써 무시한 주장이다. 공정한 재판보다 무작위 배당 원칙을 앞세우는, 앞뒤가 바뀐 논리라는 비판도 피하기 어렵다.

대법원은 “공정성 시비가 있다면 법원의 예규에 따라 사무분담 변경이나 사건 재배당 등을 통해 법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의혹’이라서 재판하면 안 된다?

대법원은 특별재판부가 맡을 사건에 대해서도, 법안의 문구를 문제삼아 비판 의견을 냈다. 법안이 특별재판부 심리대상으로 열거한 사건 가운데 ‘재판거래 의혹과 관련된 대법원장·대법관·판사 등에 관한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단순한 ‘의혹’까지 대상으로 삼으면 범위가 무한정 넓어진다. 수사기관의 주관적 의지에 따라 재판부의 구성이나 재판절차의 종류가 변경되는 것이 된다”고 비판했다. 대법원은 또 “‘수사과정에서 범죄사실이 발견되어 기소된 관련 사건’도 대상사건에 포함하면 대상사건의 범위가 무한정 넓어질 우려가 있다”고 거듭 주장했다.

‘재판거래’ 의혹은 법원행정처 문건과 검찰 수사로 상당 부분 확인되고 증거까지 확보되는 등 이미 의혹 수준을 넘어 사실확정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어서, 법원의 이런 문제제기는 다소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수사 및 기소 대상사건을 검찰이 무한정 넓힐 것이라는 법원의 우려도 법원이 잇따라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한 것에 비춰보면 현실성이 떨어진다.

‘이 많은 법관을 다 배제할 수 있나’?

대법원은 사법농단 관련한 과거 재판이나 보고서 작성에 관여한 법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법관 등을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서 배제(제척)하자는 법안 내용에도 반대 의견을 밝혔다. “다른 형사재판에선 인정되지 않는 제척사유를 이번 사건에서만 확대하는 것은 의문이 든다. 그래야 한다면 형사소송법을 개정해 전체 형사재판의 제척사유로 규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민낯의 거센 투정처럼 들린다.

대법원은 법안의 제척사유대로 하면 “제척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해진다”며 “‘피고인과 같은 재판부에 근무했다’는 점까지 제척사유로 하면 대법원의 소부 구성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제척사유 중 하나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임명제청한 대법관’이 현재 8명이어서, 전체 대법관의 3분의 2 이상이어야 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를 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 많은 ‘관련 법관’들을 설마 다 솎아낼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특별재판부 도입이 주장되고 있다는 현실에는 눈을 감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