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지성인(혹은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정치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말을 해서는 안되겠다.

 

선거상황에 대해서, 

'그 놈이 그 놈이다', '뽑을 사람이 없다'

와 같은 말을 한다면, 지성인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무식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선거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치가 어떻게 발전하는지?

최악의 정치인이 어떻게 생존하는지?

이런 것에 대해서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을 때나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지식인라 생각한다면, 

지성인 답게, 생각하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정치에 대한 무식함 또는 무관심 또는 몰이해는

지성인(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다.

 

지식인이라면

정치혐오를 조장하는 농간에 놀아나서는 안된다.

 

 

 

(관련 글)

‘선거란 누구를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뽑지 않기 위해 투표하는 것이다.’--프랭클린 P 애덤스

시사,정치,민주주의 2021. 12. 2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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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무관심의 대가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이 말은 플라톤의『국가』에 나오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코스의 '정의는 강한 자의 편익'이라는 명제에 대해 반론하면서 이렇게 말하죠. 선거를 맞이 하여 정치철학의 고전들에서 석학들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구절들을 선별해보았습니다.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에,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일세. 훌륭한 사람들이 정작 통치를 맡게 될 때는, 그런 벌을 두려워해서 맡는 것으로 내겐 보이네. 그리고 그때 그들이 통치에 임하게 되는 것도 그들이 무슨 좋은 일에 임하기라도 하거나, 또는 그런 일로 안락하게 지내게라도 되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부득이한 일에 임하는 것이어서, 그리고 자신들보다도 더 훌륭하거나 또는 자기들과 같은 수준의 사람들에게 그걸 떠맡길 수가 없게 되어서 일걸세. 만약에 훌륭한 사람들의 나라가 생긴다면, 그러한 나라에서는, 마치 오늘날 통치를 맡으려는 것이 싸움거리가 되는 것처럼, 서로 통치를 맡지 않으려는 것이 싸움거리로 될 것 같기에 말일세. 그리고 이 경우에 진실로 '참된 통치자'는 본성상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게 되지 않고, 다스림을 받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게 될 것임이 명백해질 것 같기에 말일세. 그래서 식견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다 남을 이롭도록 하느라고 수고를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남의 도움으로 자신이 이롭도록 되는 쪽을 택할 걸세. 그러므로 나로서는 이 점에 대해서, 즉 올바른 것은 더 강한 자의 편익이라는 것에 대해서 트라시마코스와는 도저히 의견을 같이할 수 없다네."

-플라톤 『국가』(서광사,1997, 101~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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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플라톤을 오역한 어느 ‘지식인을 위한 변명’ / 최인호

등록 :2018-06-11 18:09 수정 :2018-06-11 19:3

 

최인호
번역가·저술가

<맨 인 블랙> 시리즈로 유명한 미국 배우 윌 스미스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플라톤의 <국가>를 가르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플라톤의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읽지 않고는 미국 시민이 될 수 없어요.

 

뼈 있는 농담이라면 빠지지 않는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이 살아 있다면 이 할리우드 배우에게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어이, 윌. 내가 전에 말했듯이, 고전이란 모두가 칭찬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네. 그러니 자네 말대로라면 미국은 미국 시민이 살지 않는 나라가 되겠는걸.” 윌 스미스, 의문의 1패.

 

권력의 부정부패 뉴스가 불거지거나 선거철이 다가올 때면 소셜미디어 이곳저곳에서 플라톤의 경구 하나를 만나게 된다.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같은 내용의 다른 버전도 있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정말로 플라톤의 <국가>에는 이와 비슷한 말이 있다. 하지만 윌 스미스의 권고대로 그 책을 정말로 읽으면, 이 경구에 ‘좋아요’를 표시하기 전에 잠깐 머뭇거리게 된다. 플라톤은 <국가> 제1권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트라시마코스라는 소피스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그 논쟁에서 소크라테스는 대략 다음 요지의 의견을 펼친다.

 

“통치는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욕심과 야망이 없는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라서, 돈도 명예도 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에 나서도록 만드는 방법은 그들에게 압박을 가하거나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훌륭한 분들이 스스로 통치에 나서기를 거부할 때 그들이 치르는 가장 큰 대가는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들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이들이 정작 통치를 맡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대가에 대한 우려 때문인 듯합니다.”

 

요컨대, 결국에는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자진해서 통치하게 되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말이고, 해당 시대의 통치자들은 돈도 명예도 관심 없는 해당 시대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말이며, 이 훌륭한 사람들의 통치가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민주주의가 시민의 적극적 정치 참여를 요청한다는 취지의 경구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엘리트주의적 논리 전개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누군가가 발언의 앞뒤를 자르고, 원래의 어구를 수정해서 퍼뜨린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 장본인을 한 사람의 지식인이라고 여기며, 이름 모를 이 지식인의 순차적 작업을 상상하면서 빙그레 웃음을 짓게 된다. 그는 민주주의를 혐오하는 고대의 철인정치 철학자께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집필한 위대하고 고매한 정치철학서 <국가>에서 문제의 구절을 발견한다.

 

이 구절을 그 밑자락에 얽혀 있는 엘리트주의적 궤변으로부터 우두둑 거칠게 뜯어낸 뒤, 거기에 딸려 올라온 먼지를 탁탁 털어낸다. 경구를 명심할 주체들을 ‘모든 시민들’로 바꾸는 것이다. 다음 작업으로 칼을 들어 문구를 슬쩍 다듬는다. ‘스스로 통치에 나서지 않는’을 ‘정치에 무관심한’으로, ‘자기들보다 못한’을 ‘가장 저질스러운’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읽어보면, 우리가 자주 본 그 명언이 된다.

 

저질의 정치에 피해를 보는 시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명언, 정치의 품질에 대한 시민들 자신의 책임을 깨닫게 하는 명언, 적극적인 정치적 관심과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명언의 탄생이다.

 

그러니 이 경구를 어느 무지한 자의 플라톤 왜곡이라고 오만하게 비판하지 말자. 고전의 권위와 명성에 주눅 들지 않는 무명의 용감한 지식인이 공화적 상상력으로 참신하게 살려낸 문장이다. <국가>를 읽는 것보다 이 명언 하나를 명심하고 실천하는 게 백배는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윌 스미스, 의문의 2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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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연&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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