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의 말...
"한국은 고상한 국민이 살고 있는 보석같은 나라다" - 펄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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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한국은 일본이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에 노벨수상자가 열받은 이유 '한국은 건들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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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로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벅 여사는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40여년을 살았기 때문에 중국을 사랑한 미국인이였지만
오히려 중국 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며 한국의 독립과 혼혈문제와 여성인권에 대해서
한국에 많은 목소리를 내주었고 미국에서 활동을 해주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펄벅 여사의 이런 면목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영상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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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 (Pearl S. Buck) - 편견 없는 ‘대지’처럼 영원한 어머니
펄 벅 (Pearl S. Buck)
편견 없는 ‘대지’처럼 영원한 어머니
Pearl S. Buck (1892∼1973년)
그녀는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났으나, 중국 선교사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생후 석달 만에 중국으로 건너가 양쯔강 연안의 전장이라는 소도시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가족은 선교사들의 거주지에서 생활하지 않고 중국인들 속에서 살았다. 때문에 그녀의 어린 시절 친구들과 기억은 중국과 뗄 수 없다.
'어린시절 내가 중국인인 줄 알았다'고 얘기할 정도로 그녀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방식 아래서 자랐다. 그녀를 키워준 유모인 ‘왕노파’에게서 중국말을 먼저 배우고, 중국의 전래 이야기를 들으며, 중국 옷을 입고 중국인 학교에 다니며 중국 서적을 탐독했다.
펄 벅은 18세에 미국으로 돌아가 버지니아의 랜돌프 메콘 여자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다시 아픈 어머니를 병간호하기 위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7년 펄 벅은 농업 전문가 존 로싱 벅(John L. Buck)과 결혼하여 화북에서 5년 정도를 보내고, 다시 남경으로 가 선교사로 일한다. 그녀는 난징 대학 교수가 된 남편과 함께, 영어를 가르치고, 10여년간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기도 한다. 그녀는 이 시절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녀에게 글을 쓰게 만든 중요한 두 가지 동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정신지체아인 그녀의 큰딸 캐롤이다. 소설 `자라지 않는 아이'에서 그녀는 고백처럼 이야기한다.
또 다른 하나의 체험은, 중국 체류 시절 그녀가 겪은 중국 전체의 사건들이다. 특히 1900년 의화단사건과 1927년 국민정부군이 난징으로 쳐들어 왔을 때, 그녀는 온 가족이 몰살당할 위기를 겪기도 했다.
펄벅의 가족사진 (왼쪽의 소녀가 펄벅)
가깝게 지내던 중국인의 도움으로 위기는 모면했지만, 중국민족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자신들이 서양인이란 이유로 죽을 뻔했다는 체험은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런 체험들은 그녀의 작품 안에 녹아있다. 그녀는 서양인의 시각이 아니라, 중국을 제2의 조국으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다.
펄 벅은 1930년 동서양문명의 갈등을 다룬 장편 처녀작 <동풍서풍>을 시작으로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다. 1930년 남경에서 쓴 <대지>는 호평을 받고, 퓰리처상과 미국 문예 아카데미 하웰즈 상을 받았다. 1938년에는 미국 여류작가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노벨상을 받는 펄벅여사)
그녀는 계속해서 32년과 35년 <대지>의 속편인 <아들들>과 완결편 <분열된 가정>을 출간했다. 1934년 이혼한 그녀는 출판사 사장 리처드 월시와 재혼하여 미국에 정착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중국난민들을 위해 일했던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고통을 돕기 위해 자신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펄 벅은 소설과 수필, 평론, 아동서적 등 80여편의 책을 출판하면서, 동시에 사회사업을 몸소 행하면서 살았다.
1964년에는 펄벅 재단을 설립해 1967년에는 그년 수입의 대부분인 7백만 달러가 넘는 돈을 재단에 희사했다. 그녀는 1973년 3월 6일 사망할 때까지, 세계 평화를 위한 활동을 했다.
http://www.novel.co.kr/last_novel/novbank/classic/991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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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이 바랐던 세상
펄 벅이 소설〈대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실은 많은 이들이 안다. 그러나 구한말 한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 〈살아 있는 갈대〉가 그의 또다른 걸작이라는 것,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회사업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60년대 초, 글을 쓰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펄 벅은 그 후 10여년을 한국에서 보내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곤 했는데, 〈살아 있는 갈대〉 서문에는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며 찬사를 보냈고, 1973년 한국을 떠날 때에는 “한국 아이들이 보고 싶을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유서에는 “내가 가장 사랑한 나라는 미국에 이어 한국”이라고 쓰기도 하였다.
그 밖에 한국에 대한 사랑은 많은 일화로 전해져 오지만, 무엇보다 애착을 보인 것은 한국에서 활동했던 사회사업가로서의 삶이었다. 스스로 8명의 어린이들을 입양한 그는 ‘나의 여생을 전력투구하여 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헌납하겠다’며, ‘출생’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어린이들의 존재를 알리고 그들이 당면한 사회적 불평등과 편견을 줄이기 위해 여생을 바쳤다.
(1960년대 한국의 혼혈아동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마련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갈대>를 집필하는 동안 한국전쟁 혼혈아들을 돌보기 위해 부천지역에 ‘소사희망원’을 설립하였고, 그들을 손수 입히고 먹이고 씻기는 일들을 마다지 않았으며, 이를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자신의 조국 미국에 지원단체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넘은 세월. 잊지 못할 것이라며 눈물 흘렸던 한국의 아이들, 출생으로 인하여 고통받던 그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는 어떠했을까.
요즘은 혼혈 연예인들이 대거 등장하여 서툰 한국말과 어설픈 몸짓으로 인기몰이를 하자 혼혈인에 대한 편견이나 어려움이 사라진 것처럼 호들갑이지만, 안타깝게도 각광받는 혼혈 연예인 대부분은 백인계 중산층 출신으로, 오히려 우리 사회의 이중 잣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유창한 영어실력과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이들은 보통의(?) 혼혈인뿐 아니라, ‘토종’ 한국인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흑인계, 동남아계 혼혈이거나 같은 백인계라 해도 영어 대신 한국말을 쓰고 한국의 편모 가정 출신이면, 이들을 보는 눈길은 당장 달라진다.
편견이나 미움을 받을 만한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개선하고 타파하고자 노력하겠지만, 어찌해볼 도리 없는 ‘출생’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 자신에게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인 것이다.
(한국의 혼혈아들과 즐거운 한때)
30년 전 펄 벅이 이 땅을 떠나며 흘렸던 눈물에는 이곳에서 담은 추억이 너무나 많아서였을 것이다. 또, 가난한 한 나라에서 ‘출생’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쏟아부은 자신의 애정과 노력이 머지않아 결실을 보게 되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제 강산이 서너번 바뀌고 21세기 지구촌 시대가 되었지만, 그녀가 바랐던 세상은 너무나 더디게 오고 있다. 아니, 더뎌도 오기나 했으면 좋겠다.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는 표현이 더는 무색하지 않도록 말이다.
이지영 / 펄벅재단 사회복지사·간호사
http://www.hani.co.kr/section-001035000/2004/10/0010350002004101820272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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