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스페이스 공감이 초대해야 할 음악인!'으로 음악 관계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 표 던지기에 주저하지 않은 음악인이 있다. 포크 음악의 서정성과 시대정신을 동시에 갖춘 한국 대중음악사의 거인 '송창식'. '새는', '선운사', '피리 부는 사나이', '담배 가게 아가씨' 등 그의 노래는 동시대인들에게 '내 인생의 첫 노래'에 다름 아니었다. 1968년 윤형주와 함께 한국 포크 음악의 계보를 연 '트윈 폴리오'로 활동하며 번안곡을 노래하던 그는 2년 뒤 '창 밖에는 비오고요'를 발표하며 솔로로 데뷔했다. 그때부터 가수는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70년대 싱어 송라이터의 시대가 열린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 O.S.T를 통해 젊은이의 꿈과 좌절을 노래한 '왜 불러', '고래사냥'은 넘버원 행진을 거듭하며 대중적 인기를 거머쥔다. 무엇보다도 그의 노래들은 한국 가요계를 한 차원 성장시켰는데 그것은 그의 음악의 변화 과정과도 맞물린다. 초기 클래시컬한 선율과 깊이 있는 가사로 한국 가곡의 근본에 도전하는가 하면, 70년대 후반 트로트, 포크, 록, 국악을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스타일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그 노래들은 '송창식 표 발성'으로 독특하지만 매력 넘치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우리 음악 체계를 연구하며 곡을 썼다는 그에게는 '언제나 음악의 근원을 면밀히 탐구한 음악가'라는 이름이 주어지기도 했다. 특별히 이번 무대는 음악 관계자들에게 거론된 '시인과 촌장'의 기타리스트 함춘호와 '트윈폴리오'의 윤형주가 함께 한다. 세 사람의 각별한 만남을 EBS 스페이스 공감 6주년 기념 공연에서 만나보자.
출 연 : 송창식(보컬/기타), 함춘호(기타) , 윤형주 프로그램 : 나의 키타 이야기, 담배 가게 아가씨, 피리 부는 사나이, 상아의 노래 外
Nawsae Lee3개월 전(수정됨) 아, 안타깝다, 송창식. 그가 저렇게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 . 그가 2,3십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지금의 '한류'파급력에 힘입어, 한국의 대중음악이 이렇게 수준높은 분야도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며 지금의 아이돌위주의 K-pop보다 10배는 더 많은 국제적 팬층을 만들 수 있었을텐데. (= 전세계의 한류 팬들에는, 음악분야에서, 아이돌 위주의 케이팝을 안좋아하는, 그리고 훨씬 더 '깊은' 맛의 한국문화를 찾는 이들이 무척 많다)
송창식. 진정 '천재중의 천재'. 대한민국 가요 백년사에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다. =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재능 --- 한국대중음악사의 한 획을 그은 거장들이 있지만, 그 모든 거장들 중에서도 송창식을 최고로 꼽는 이유는 단연 그의 독보적 독창적 음악세계때문. 즉, 신중현도 조용필도 모두 정말 뛰어난 거장임은 분명하지만, 그들보다 송창식이 한 수 더 위인 것은, 신/조 모두 서양 장르(소울/블루스/롹 . . .)를 수입하여 --- 그러나 완전히 스스로 소화/체화하는 데에 성공하여 --- 이룩해 낸 것임에 반해, 송창식의 음악은 정말로 한국적 고유정서를 온전히 담아, 마치 전래동요/전래민요 같은 느낌이 들 정도라서, 듣고 있노라면 '그래, 이게 바로 한국성(性)이지 !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는 점.
그러한 '한국 고유성' 이외에도, 그의 '모든' 곡들이 갖는 높은 품격 또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그의 곡들은 모두, 선율은 죄다 '예술작품' 수준이요 가사는 죄다 '문학작품' 수준 = 가사마다 한편의 '시(詩)'다. (***여기서 '문학작품수준'이라고 할 때, 그 '문학작품'이란, 겉보기에 아주 '고매'한 문구들만 나열된 것만이 '문학작품'이 아님을, 문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 그건 마치, 미술에서, 진정 수준높은 미술작품은 --- 그냥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는 것, 또는 화려하게만 그리는 것. . . 등이 아니고 --- 인간의 온갖 감정을 얼마나 잘 투영했느냐에 따라 판단되는 것과 같은 이치)
그리고 여기 이 곡은, 비록 '한국고유성/토속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예외적 작품이나, 그 작품성/완성도가 너무 놀라운 곡. = 이 곡은 완전히 지중해를 떠올리게 하는 유럽 풍의 선율인데, 한국인이 유럽의 곡보다 더 유럽스러운 곡을 만들어냈다는 것부터가 화젯거리였다. (*** 이것이 그렇게 멋진 유럽풍이었음을 반증하는 뒷 얘기 :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중의 하나인 훌리오 이글레시아스가 이 곡을 듣고 너무 마음에 들어 자기 앨범에 넣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뭏든 송창식은 천재.
하늘이 내려준 음악적 문학적 재능. . . 그의 천재성을 생각할 때, BTS가 몇 십, 몇 백 억 씩 번다는 걸 생각한다면, 너무도 아깝다.
---- Nawsae Lee 내가 송창식을 떠올릴 때마다 가장 아쉬운 / 슬픈 것은, 앞으로 더 이상 노래를 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저런 음악, 저런 가수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점. = 그의 너무도 독보적인 선율 + 독보적인 가사 들 + 그리고 마치 편하게 숨을 쉬는 듯 부드러운데 온 공간이 울리는 그 독보적인 발성/창법. . . 이런 걸 다 갖춘 가수가 이제 더이상 없다는 점. 아니, 사실은, 전세계적으로도, 위 세가지 요소를 다 갖춘 '싱어송롸이터'로서의 가수 --- 그것도 기타 하나만 가지고 저렇게 해낼 수 있는 --- 가 몇이나 되나? 전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존재였는데. . . 그가 저렇게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다시 말해, 송창식 이전에 송창식 없고 송창식 이후에 송창식 없다고 해야할까. 암튼 지난 백년을 통틀어 저만한 천재가 없었으니. . . (밥딜런이 통키타 싱어송롸이터로 그리 유명하지만 그건 그의 곡이 좋은거지 그가 노래를 잘 부르는건 아니니까, 즉, 가창력 면에서는 아주 꽝이고... 글쎄, 존 바에즈는 가창력도 좋고 곡/가사 모두 잘 만든다는 점에서 옆에 세워줄 만 하고. . . 폴 사이먼은 곡/가사는 잘 쓰지만 송창식만큼의 가창력은 아니고. . . .)
송창식 특유의 감성과 노래 가사에 나타나는 주인공 행동을 연상시켜주는 독특한 애드립부터 클래식 전공자답게 엄청난 성량까지 지닌 대단한 가창력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전성기 시절 엄청난 퀄리티의 시대를 앞서간 곡들을 뽑아 냈는데 매우 많은 그의 노래들 대부분이 송창식 본인의 작사,작곡이다.
한국 가요사에서 단 한명의 천재를 뽑으라고 하면 '단연 송창식'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음악평론가 강헌이 말하길 가왕 조용필의 맞은편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단 한명의 가수라 부를 수 있겠다.
세시봉 출신으로 70-80년대 포크송계를 주름잡았던 가수. 원래는 윤형주와 함께 듀엣 트윈폴리오로 데뷔했다가 윤형주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1970년에 솔로로 전향한다. 특유의 대충 부르는 듯 하지만 절대로 따라부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창법이 특징이다. 마치 해탈한 도인이 너털웃음을 짓는 듯 한 가창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따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흉내만 내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다. 아닌게 아니라 음악으로 득도한 천재라고 할 수 있다. 그 막말도 잘 하고 노래에 자부심이 상당한 조영남도 노래에 대해 전혀 태클을 걸지 못했다 할 정도.[2]
더불어 고아 출신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도 가출하여 친척집도 여기저기 다니고 어릴적에 참 고생했다고. 90년대 뭐 언론이 어머니를 뵈실 생각이 있냐니까 잊었다고 했다. 하긴 그 언론도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윤형주는 경기고 출신 연세대 의대생[3]의 엘리트 이미지라면, 송창식은 서민적인 이미지로 대변된다. 윤형주가 특유의 맑은 미성과 (수백곡의 CM송을 작곡한 데서 알 수 있듯) 대중친화적인 작곡 능력을 바탕으로 진정한 의미의 '팝(popular)' 음악을 선보였다면. 송창식은 유니크한 톤의 보컬과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작곡을 통해 송창식 특유의 예술세계를 담은 음악을 선보였다.
사실, 보컬로서 노래실력뿐만 아니라 기타리스트로서도 상당한 스킬을 가지고 있다. 세시봉 중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이고 전문가 중에서도 보컬보다 기타 실력을 더욱 부각해서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참고로 송창식의 예술성이 어느 정도 깊이인지를 좀 더 느껴보고 싶다면, 월간 객석[4]에서 클래식 신예 바이올리니스트인 조진주가 그와 나눴던 인터뷰(2015년 8월호)를 일독하길 바란다. 일반인이 보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조차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어렵고 심도깊지만, 그가 음악에 대해 어느 정도로 연구하고 어떤 철학을 가지며 연습하고 있는지를 느끼는 것은 충분할거다.
이는 물론, 윤형주에겐 예술성이 부족하고 송창식에겐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중2병스러운 비교가 아님을 밝힌다. 각기 다른 음악의 방식으로 일가를 이룬 두 거장들을 비교해서 누가 더 낫다 아니다를 따지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유념하자. 어차피 그런 비교는 어차피 사실도 아니다.
하지만, 금전 관리가 철저했고 사업수완이 있었던 윤형주는 많은 재산을 축적해 재산가가 된 반면에[5] 사람이 너무 좋아서 보증도 서 주고 돈도 꿔 달라는 대로 꿔 주던 송창식은 많은 재산을 잃었다. 물론, 송창식이 돈을 잘 벌던 시절에 알랑대며 돈을 꿔 간 사람들 중 제대로 갚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빈털터리인 것은 아니며,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저작권료로만 매해 7,500만원의 고정 수입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냥 쓸만큼 있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라 그 시절 돈을 꿔가고 보증을 서준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도 없다고 한다. 윤형주와는 트윈 폴리오를 하기 전 부터 절친한 사이였고 지금까지도 그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예전에 세시봉 멤버들이 나와서 토크할때 송창식씨의 가난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에서는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넘어서 달랑 기타 하나를 들고 노숙하면서 지내고 노래 불러주면서 밥을 얻어먹고 이 집에서 며칠 저 집에서 며칠 하는 식으로 생활했을 정도로 매우 가난했다고 한다.
그의 최종학력은 서울예고 중퇴. 동창으로는 금난새가 있다. 금난새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음악에 정말 천재였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가난해서 매일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기억이 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친구가 바로 송창식. 애초에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꿈꾸는 클래식 전공자였으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사정 때문에 중도 포기했다.
이후 방황하다가 클래식 창법으로 대중가요계에 등장한 조영남을 만나면서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세시봉과 오빈스캐빈에서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김민기, 양희은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을 만났고 특히 윤형주와 트윈폴리오를 하면서 재능이 만개했다. 주)위 내용은 나무위키에서 발췌 하였습니다.
소향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우리나라 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것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된다.
때마침, 오늘 소양에 대한 인터뷰방송 영상을 우연하게 발견하게 되었는데,
소향에 대해서 몰랐던 많은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 영상이다.
이영상이 마침 영어자막을 넣은 방송이라서 외국인들도 관심있을 것같아서,
소향 인터뷰 영상 링크를,
소향 노래에 리액션하는 유튜브 영상 몇개에 댓글로 남겨 보았다.
외국인들이 이 소향 인터뷰 영상에 얼마나 관심이 있을지 궁금하다.
어지간한 관심이 있는 가수가 아니라면,
굳이 그 사람의 인터뷰 영상에 관심을 갖게 되진 않을 것같다.
더구나 외국인의 외국어 인터뷰라면....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댓글 몇개로 외국인들이 외국 가수의 인터뷰에 관심갖는 것은 거의 가능성 없는 일이다.
그런데,
소향이라면, 소향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깊은 외국인라면
왠지 관심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PS. 댓글 내용은
소향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This is the last of 3 videos of Sohyang's interview at "Feel Good Morning (기분 좋은 날). Make sure to turn on Closed Captions on Youtube for English translation! ==> youtu.be/jwAyhShBtWw
이은미는 MBC 파업 153일째를 맞아 30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김재철 MBC 사장 헌정 콘서트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에 출연했다.
MBC 파업콘서트 무대에 오른 이은미는 "이명박 새누리당 정권이 싫다고 해서 대한민국 국민임을 거부할 수 없듯이, 저는 가수입니다 제가 노래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김재철 사장 때문에 MBC에 출연하지 않겠다 하는 것은 비겁하게 느껴졌었다"며 "제 방식대로 제가 해왔던 대로 저의 뜻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이은미는 "여러분들의 자부심이 여러분들을 더욱 멋진 곳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 믿는다"며 파업 참가자들을 응원했다.
어제(12/30)는 하루종일 TV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하루가 되었네요. 2012년 마지막 일요일이었던 어제 SBS 연예대상, KBS 감동대상, MBC 연기대상 등 굵직한 연말 시상식이 열렸고, 나가수2 가왕전이 방송되었습니다.
<나가수1>때는 한동안 거의 매주 리뷰를 쓰면서 여러분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었지만, <나가수2>는 외부의 압력(?)으로 보는데만 만족하며 가왕전이 끝날때까지 여러분들과의 소통을 즐기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나가수2>는 어제 방송된 <슈퍼디셈버 2012 가왕전> 파이널 경연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시즌1때만큼 화제성도, 시청률도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나가수2>는 종료했습니다.
그래서 <나가수3>이 내년에 방송될지는 현재로선 미지수입니다. MBC 측은 <나가수>를 폐지한다고 말한 적 없다고 밝힌 바 있지만 <나가수2>에 출연한 가수만 하더라도 24명이나 되니 가수들을 섭외하는데도 쉽지않을 것 같아 <나가수3>의 방송 여부는 불투명해 보입니다.
어쨌거나 저에게는 <나가수2>가 있어서 즐거운 한해가 되었습니다. 이왕이면 <나가수>가 계속 존립하면서 지난 두 시즌동안의 경험을 밑바탕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재탄생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아울러 팬들과도 조건없이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길 바라봅니다.
어제 방송된 <나가수2> 가왕전 최종 파이널 무대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은미의 아량과 배포가 돋보인 무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론 가왕자리에 오른 <더원>의 무대는 매우 훌륭했고 가왕에 올라 마땅한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은미가 가왕자리에 욕심이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거라고 전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더원은 가왕을 노리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 반면, 이은미는 가왕자리 자체에 이미 초월한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느꼈다고 해서 더원을 깎아 내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오해 없으시길... ^^)
<나가수2>의 지난 여정을 보면 이은미에 의한 <나가수2>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가수2> 메인MC는 물론 첫 방송때부터 마지막 방송때까지 이은미는 빠짐없이 무대에 올라 <나가수2>무대의 중심을 잡아준 일등공신이었습니다.
음악이 평가받고 순위가 메겨지는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던 이은미가 <나가수2> 무대에 선 이유는 오로지 <나가수2>와 같은 라이브 무대가 활성화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본인도 그렇게 말했구요...
[2012년 7월 4일 신인가수 주효의 싱글앨범 '슈퍼로켓'의 쇼케이스에 참석한 이은미, ⓒ스포츠코리아]
그렇습니다. <나가수2>는 그 어떤 논란보다 가수들의 라이브 무대를 일요일 황금시간대에 볼 수 있었다는 자체만으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라이브의 여왕, 맨발의 디바 이은미는 <나가수2>가 차려놓은 만찬을 가장 맛있게 즐긴 가수였고, 이은미가 그렇게 중심을 잡아줌으로써 <더원>, <국카스텐>, <소향>과 같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 뮤지션들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은미는 가왕전 파이널 무대 2차 경연에서 아이유의 "나만 몰랐던 이야기"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1차 경연때 부른 "Both Sides Now"와 분위기가 비슷했기 때문에 가왕을 노렸다면 다른 곡 즉, 이은미만은 폭발력을 보여줄 수 있는 ROCK을 선택했을게 틀림없었지만 이은미는 자신의 음악 색깔을 보여주기 위해 "나만 몰랐던 이야기"를 비교적 담담하게 열창했습니다.
바로 이점이 1차 경연에서 근소한 차이지만 앞서고도 이은미가 가왕 자리에 오르지 못한 이유였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은미는 알고 있었을겁니다. <나가수>의 평가시스템은 방청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재미를 위한 장치일 뿐이란걸...
1기 방송분에 대해서는 나는 가수다 1 문서를, 3기 방송분에 대해서는 나는 가수다 3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이 문서는 위키백과의 기술적인 한계로 인하여 다른 제목을 사용합니다. 이 문서의 정확한 제목은 나는 가수다 Ⅱ입니다. 〈나는 가수다 Ⅱ〉는 《우리들의 일밤》에서 방송했던 코너로 2012년 4월 29일부터 2012년 12월 30일까지 방영되었다.
(나가수2 출연 가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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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추가)
* 평소 좋아하는 가수 이은미가 진행하는 음악방송(TBS 이은미와 함께라면)에 소향이 나왔네요.
그녀는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태어났으나, 중국 선교사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생후 석달 만에 중국으로 건너가 양쯔강 연안의 전장이라는 소도시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가족은 선교사들의 거주지에서 생활하지 않고 중국인들 속에서 살았다. 때문에 그녀의 어린 시절 친구들과 기억은 중국과 뗄 수 없다.
'어린시절 내가 중국인인 줄 알았다'고 얘기할 정도로 그녀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방식 아래서 자랐다. 그녀를 키워준 유모인 ‘왕노파’에게서 중국말을 먼저 배우고, 중국의 전래 이야기를 들으며, 중국 옷을 입고 중국인 학교에 다니며 중국 서적을 탐독했다.
펄 벅은18세에 미국으로 돌아가 버지니아의 랜돌프 메콘 여자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다시 아픈 어머니를 병간호하기 위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7년 펄 벅은 농업 전문가 존 로싱 벅(John L. Buck)과 결혼하여 화북에서5년 정도를 보내고, 다시 남경으로 가 선교사로 일한다. 그녀는 난징 대학 교수가 된 남편과 함께, 영어를 가르치고, 10여년간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기도 한다. 그녀는 이 시절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녀에게 글을 쓰게 만든 중요한 두 가지 동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정신지체아인 그녀의 큰딸 캐롤이다. 소설 `자라지 않는 아이'에서 그녀는 고백처럼 이야기한다.
또 다른 하나의 체험은, 중국 체류 시절 그녀가 겪은 중국 전체의 사건들이다. 특히 1900년 의화단사건과 1927년 국민정부군이 난징으로 쳐들어 왔을 때, 그녀는 온 가족이 몰살당할 위기를 겪기도 했다.
펄벅의 가족사진(왼쪽의 소녀가 펄벅)
가깝게 지내던 중국인의도움으로 위기는 모면했지만, 중국민족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자신들이 서양인이란 이유로 죽을 뻔했다는 체험은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런 체험들은 그녀의 작품 안에 녹아있다. 그녀는 서양인의 시각이 아니라, 중국을 제2의 조국으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다.
펄 벅은1930년 동서양문명의 갈등을 다룬 장편 처녀작 <동풍서풍>을 시작으로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다. 1930년 남경에서 쓴 <대지>는 호평을 받고, 퓰리처상과 미국 문예 아카데미 하웰즈 상을 받았다. 1938년에는 미국 여류작가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노벨상을 받는 펄벅여사)
그녀는 계속해서32년과 35년<대지>의 속편인 <아들들>과 완결편 <분열된 가정>을 출간했다.1934년 이혼한 그녀는 출판사 사장 리처드 월시와 재혼하여 미국에 정착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중국난민들을 위해 일했던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고통을 돕기 위해 자신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펄 벅은 소설과 수필, 평론, 아동서적 등 80여편의 책을 출판하면서, 동시에 사회사업을 몸소 행하면서 살았다.
1964년에는 펄벅 재단을 설립해 1967년에는 그년 수입의 대부분인 7백만 달러가 넘는 돈을 재단에 희사했다. 그녀는 1973년 3월 6일 사망할 때까지, 세계 평화를 위한 활동을 했다.
펄 벅이 소설〈대지>로 노벨문학상을받은 사실은 많은 이들이 안다. 그러나 구한말 한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 〈살아 있는 갈대〉가 그의 또다른 걸작이라는 것,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회사업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60년대 초, 글을 쓰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펄 벅은 그 후 10여년을 한국에서 보내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곤 했는데, 〈살아 있는 갈대〉 서문에는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며 찬사를 보냈고, 1973년 한국을 떠날 때에는 “한국 아이들이 보고 싶을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유서에는 “내가 가장 사랑한 나라는 미국에 이어 한국”이라고 쓰기도 하였다.
그 밖에 한국에 대한 사랑은 많은 일화로 전해져 오지만, 무엇보다 애착을 보인 것은 한국에서 활동했던 사회사업가로서의 삶이었다. 스스로 8명의 어린이들을 입양한 그는 ‘나의 여생을 전력투구하여 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헌납하겠다’며, ‘출생’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어린이들의 존재를 알리고 그들이 당면한 사회적 불평등과 편견을 줄이기 위해 여생을 바쳤다.
(1960년대 한국의 혼혈아동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마련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갈대>를집필하는 동안 한국전쟁 혼혈아들을 돌보기 위해 부천지역에‘소사희망원’을 설립하였고, 그들을 손수 입히고 먹이고 씻기는 일들을 마다지 않았으며, 이를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자신의 조국 미국에 지원단체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30년이 넘은 세월. 잊지 못할 것이라며 눈물 흘렸던 한국의 아이들, 출생으로 인하여 고통받던 그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는 어떠했을까.
요즘은 혼혈 연예인들이 대거 등장하여 서툰 한국말과 어설픈 몸짓으로 인기몰이를 하자 혼혈인에 대한 편견이나 어려움이 사라진 것처럼 호들갑이지만, 안타깝게도 각광받는 혼혈 연예인 대부분은 백인계 중산층 출신으로, 오히려 우리 사회의 이중 잣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유창한 영어실력과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이들은 보통의(?) 혼혈인뿐 아니라, ‘토종’ 한국인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흑인계, 동남아계 혼혈이거나 같은 백인계라 해도 영어 대신 한국말을 쓰고 한국의 편모 가정 출신이면, 이들을 보는 눈길은 당장 달라진다.
편견이나 미움을 받을 만한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개선하고 타파하고자 노력하겠지만, 어찌해볼 도리 없는 ‘출생’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 자신에게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인 것이다.
(한국의 혼혈아들과 즐거운 한때)
30년 전 펄 벅이 이 땅을떠나며 흘렸던 눈물에는 이곳에서 담은 추억이 너무나 많아서였을 것이다. 또, 가난한 한 나라에서 ‘출생’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쏟아부은 자신의 애정과 노력이 머지않아 결실을 보게 되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제 강산이 서너번 바뀌고21세기 지구촌 시대가 되었지만, 그녀가 바랐던 세상은 너무나 더디게 오고 있다. 아니, 더뎌도 오기나 했으면 좋겠다.
이번 주 415호 상담실을 찾은 게스트는 열린민주당에서 간신히 붙은 최강욱 당선인;;; 이번 총선에서 큰 관심을 끌었던 열린민주당이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는데요... 비대위원장을 맡은 최강욱 당선인이 생각하는 열린민주당의 미래는 어떨까요? 그리고 '시사 안드로메다'가 제시하는 유쾌한 처방전은 무엇일까요?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에 최강욱(51) 변호사(법무법인 청맥)가 발탁됐다. 고위 공직자 인사 검증과 청와대 직원 비리 감찰을 담당하는 핵심 보직에 전격적으로 발탁된 것이어서,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연합뉴스에따르면, 청와대 관계자는 5일 ”최강욱 변호사가 7일부터 공직기강비서관으로 출근할 예정이다”라고 전했다.
최 신임 비서관은 전북 남원 출생으로, 전라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도 받았다. 소설 ‘혼불’을 쓴 최명희 작가가 당고모이다.
최 신임 비서관은 사법고시 아닌 군법무관 임용시험을 통해 법조계에 입문했다.군법무관 임용시험 제도는 사시와 별도의 군법무관 시험에 붙어 10년간 의무복무를 하면 변호사 자격을 부여한 것으로, 2005년 폐지됐다. 최 비서관은 1994년 군법무관 임용시험에 합격한 뒤 국방부 검찰단 수석검찰관과 고등검찰부장 대리를 지내고 지난 2005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최 비서관은 군 검찰 재직 때 비리 사건 수사를 통해 4성 장군 두 명의 옷을 벗게 만드는 전대미문의 활약상을 보였다.나무위키에따르면, 2004년 1월엔 부대 예산과 공금 횡령 혐의로 창군 이래 최초로 현직 대장인 신일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구속·기소했다. 또 같은 해 11월에는 장성 진급 비리 관련 수사를 통해 또다른 4성 장군인 남재준 당시 육군 참모총장의 사의 표명을 이끌어냈다. 역시 군 법무관 출신인 박지훈 변호사는 팟캐스트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2017년 1월27일)에 출연해 ‘이 수사로 최 변호사는 군검찰에서 전설로 불리고 있다’고 소개한 바 있다.
군검찰 예편 뒤 변호사를 하면서는 군인권 문제 관련 사건을 많이 다뤘다. ‘불온서적 지정제도의 위헌재판 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방위사업청 옴부즈만, 국가인권위원회 인권교육 전문위원, 제18대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윤리심사자문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지난 2012년 8월 이래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를 연임했다.
각종 팟캐스트와 방송 활동도 활발히 벌여왔다. 2018년 6월부터 KBS 1라디오의 시사프로그램인 ‘최강욱의 최강시사‘를 진행했고, KBS1 텔레비전 ‘저널리즘 토크쇼 J’ 패널로도 참여했다. 종편 채널A ‘외부자들’에도 고정 패널로 출연했다.
‘법은 정치를 심판할 수 있을까’ ‘끝까지 물어주마‘(공저) ‘권력과 검찰: 괴물의 탄생과 진화’(공저) 등의 책과 언론 기고 등을 통해 검찰과 정치 개혁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글입니다.
노 전 대통령은 과거 “한국의 민주주의는 갈 길이 아직 남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들 몫으로 ‘참여’를 당부했습니다.
임기를 마치고 봉화마을에 내려와 시민들에게 귀향 환영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은 “정치인들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다음 자기 당선을 위해서 소신껏 정치를 다하기가 어렵다”고 비판하면서 “시민들은 그렇지 않다. 시민 여러분들은 계속 밀고 갈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 정치사에 달변가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그의 명연설 중 10개를 모았습니다. 명장면, 명연설이 많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와 역사인식, 생각을 제대로 보여준 연설들입니다. 초선의원 시절부터 연이은 부산출마, 대통령 선거 시절과 대통령을 하면서 했던 연설들입니다.
국회 행안위 국정감사. 검찰 개혁을 상징하는 인물인 임은정 검사를 증인으로 채택한 이재정 의원. 이재정 의원은 그간 검찰 개혁의 필요성을 보여준 사건들을 제시하며 그와 관련된 임 검사의 의견을 물었으며, 임 검사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검찰이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현재 조국 장관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의 모습을 비판하며 "이런 이중적 잣대가 수사권이 조직을 보호하는 도구로 쓰인다는 증거"라며 수사권 조정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