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봉오동, 청산리 대첩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 서거 78년 만에 어젯밤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돌아오는 길, 우리 전투기 6대가 출격해 엄호했고,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공항에서 영접하며 최고의 예우를 다했습니다. 유해가 안치된 대전 현충원에는 오늘 하루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전쟁 주범으로 당시 응징되야 할 대상이었지만, 전쟁의 승리를 위해 이처럼 체계적으로 적을 연구했다니 왠지 모를 씁쓸함이 남았다.
일본인은 최고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있고, 유순하면서도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고,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고,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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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인 <국화와 칼>처럼 일본인의 이중성에 대해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서늘한 가을에 피어나는 국화를 청결하고 고귀하다고 좋아하는 일본인들, 그들은 겸손하고 예의바르지만 마음속에는 무서운 ‘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일본이 계층제도에 대해 신앙과도 같은 신뢰를 가지고 있어, 이러한 신뢰가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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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미국의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1887 ~ 1948)가 지은 일본학 연구 도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1년 전인 1944년에 미국 정부의 위촉으로 저자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인류학 분석을 목적으로 저술하였으며 종전 1년 후인 1946년 미국에서 공식 발간되었다. 주로 일본과 일본인은 물론 일본 문화와 풍습 등을 다루었으며 이를 통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해부적인 내용으로 저술해 나갔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일본과 전쟁 중이던 미국이 그나마 말이나 정서가 통하던 독일, 이탈리아군들과 달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본군들의 정신구조를 파악하기 위해[1] 의뢰를 했고 그 이후 집필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직접 방문하지 못했던 것도 전시상태여서 그랬다고 설명되어 있다.
다만 유독 독일이나 이탈리아 군인들과 달리 일본 군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딱히 일본만이 별종이었다기보다는 애초에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미국과 비슷한 문화권이지만 일본은 전혀 다른 문화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충격적이었던 것. 물론 나치 독일하의 독일인들이나 일본 제국하의 일본인들이나 둘다 광기에 차 있었긴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극한의 전쟁상황속에서는 평범하고 겁에 질린 인간으로 돌아간 독일 군인들과 달리 끝까지 악에 받쳐 싸우던 일본 군인들이 더 충격적이긴 했을 것이다.
제목의 뜻은 일본인들이 선호한다는 꽃인 국화(菊花)와 칼(일본도?)에서 따왔는데 국화는 일본 천황의 상징으로 천황제에 대하여 다루는 책이라 제목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무라이 정신을 부르짖으며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왜장도(倭長刀)를 들게 된 무서운 성품이 있다는 이중성을 비유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를 통해 일본과 일본인의 (일본 바깥 기준으로) 기묘한 문화체계를 저자의 전문적인 분석과 해부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전통적인 일본의 관습이나 사회체계부터 시작해 일본인들의 외적인 행동, 기본적인 사고방식, 생활 예절 및 풍습, 메이지 유신, 패전 후의 일본인 등을 다각도에 걸쳐 세세하게 나누고 심층적으로 연구하였다.
이 책의 저자는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일본을 직접 방문했다는 기록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신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이나 일본에 대해 정보통을 갖고 있다는 미국인들의 증언과 일화, 문헌조사 등을 토대로 책을 저술했으며, 일본을 직접 방문해서 일본의 내막을 알기보다는 일본에 가지 않고 간접적으로 목격하는 것이 더 엄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입증시켜 주고 있다. 시대적 한계와 간접 체험으로만 이루어진 조사 방법으로 인해 현대에는 여러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본 문화에 대한 훌륭한 연구서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일본인들에게도 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2] 우선 역사적 시각이 결여되어 있는데, 에도 시대나 메이지 시대에 통용되었지만 쇼와 시대에는 일본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았던 가치관이나 규범이 많지만, 국화와 칼은 이를 고려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 기리스테고멘(切り捨て御免)이 메이지 시대 이후 사라졌다는 언급이 없다. 그리고 직업, 신분, 세대에 상관없이 일본인들을 모두 동질적인 존재로 엮어 일반화하고, 밥 먹고 잠자는 습관 개인의 다양한 습관일 수도 있는 것들을 함부로 일반화하여 결국 서양인과 다른 '이상한' 일본인을 강조한다.
지난 학기에 인상 깊게 들었던 강의에서 교수님이 추천해주신 책이다. 문화의 차이에서 온 생각은 얼마나 다른 가치관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중점을 두는 강의였다. 우리입장에서 이해가지 않는 일본의 행동은 그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오래도록 대학생이라면 읽어야 할 책 목록에 빠지지 않았던 거겠지?
이 책은 미국인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행동들을 ( 미국은 자국의 군인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철수하지만, 일본은 목숨을 걸고라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거나 자결을 한다.) 이해하기 위해서 문화인류학자에게 일본인에 대해서 연구를 요청하여 쓰이게 되었다.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일본의 계층적 구조로부터 발전된 그들의 사상, 그리고 그들의 행위를 파악해서 상대를 파악하려는 미국의 노력, 가히 놀라웠다.
국화와 칼 일본인의 온화한 품성과 그 평온함 뒤로 숨은 날카로움. 그 양면성을 파헤친다.
시대가 많이 흐르긴 했지만 이 책을 읽으며 캐나다에서 만났던 일본인 친구들의 행동들을 더욱 쉽게 이해하게 되었다.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도 분명히 존재했으라.
'과학'이 닿을 수 없는 공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내면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한다 할지라도 그것도 인간의 지능으로부터 출발할테니까. 빅테이터를 기반으로 평균에 관한 예측은 할 수 있어도, 개개인의 복잡함까지 움켜쥘 수는 없다. 인류를 연구하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학문이라는 것을 배우고 간다. 상대를 알려면 열린 마음으로 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함도!
<책에서…>
국화와 함께 칼도 한폭의 그림 속에 나란히 표현된다.일본인은 누구보다도 싸움을 좋아하는가 하면 동시에 유순하며, 군국주의인 동시에 탐미적이다.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또한 적응력이 뛰어나고, 소극적이면서도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한다. 또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며, 보수적이면서도 또한 새로운 것은 재빨리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예상외로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르는 경우 범죄의 유혹에 빠지고 만다. 병사들은 철저히 훈련되었지만 또한 반항적이다. 11p
우리는 미국인으로서 행동할 때의 전제를 잠시 미루고, 어떤 주어진 상황 아래서 일본인이 취하는 행동은 우리가 취하는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단정하는 안이한 결론으로 비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15p
대부분의 동양인과는 달리 일본인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두려는 강한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물론 세계 확장 계획뿐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일도 일일이 기록한다. 일본인들은 놀랄 만큼 솔직하다. 어느 민족이든 다 그렇듯이 일본인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생활 전체를 쓰지는 않는다. 때로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자신이 호흡하는 공기처럼 흔하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빠뜨리는 경우도 있다. 미국인이 미국에 관해 쓸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한다. 17p
인간 사회는 스스로를 위해 어떠한 생활 설계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처하는 일정한 방식과 그러한 상황을 평가하는 일정한 방식을 승인한다. 그 사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해결방법을 전 세계의 기초로써 생각한다. 또한 그것이 아무리 곤란하더라도 하나의 전체적 체계로 받아들인다. 생활의 기준이 되는 일정한 가치체계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생활 속의 다른 부분에서 격리된 부분을 설정하여 두고는 그 속에서 위의 체계와는 다른 일련의 가치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머지않아 무능과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그들은 될 수 있는 한 많은 순응을 실현하려 한다. 또한 자기의 행동에서 무엇인가 공통된 근거와 동기를 마련한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적인 체계가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22p
교회는 민중으로부터 점점 더 경제적, 정치적 권력이 시인되어 가는 사실과 대립되는 영역에서는 권위를 잃는다. 어구는 남아 있어도 그 의미는 달라진 것이다. 종교적 교리와 경제적 관습과 줭치는 명료하게 격리된 작은 연못 속에 갖혀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상상의 경계를 넘어서 넘쳐 흘러간다. 그래서 그 물은 분간할 수 없게 뒤섞인다. 이 사실은 진리이므로 연구자는 그 연구가 경제, 성생활, 종교 또는 육아 등 여러 가지 사실 속에 분산된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한층 더 그가 연구하는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추적할 수가 있는 것이다. 23p
문화의 비교 연구도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생활양식을 세계에서 유일한 해결법으로 믿고 그것의 방어에만 급급해하는 한절대발전할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들은 다른 생활양식을 접함으로써 자신의 문화를 보다 폭넓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즐겁고도 풍요롭게 해 주는 경험을 스스로 단절시키고 있다. 그들은 너무 수세적이어서 다른 국민에게 그들 자신의 특수한 양식을 요구하는 것 이외는 다른 방도를 취하지 않는다.28p
어떤 국민의 정부에 관해 품고 있는 가정은 정당의 세력을 표시하는 숫자보다도 훨씬 일반적이며 또한 포괄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공화당이나 민주당도 정부의 존쟂를 불가피한 ㅍ필요악이며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전시 상황에서는 다르겠지만, 정부의 관직에 위촉되는 것도 민간기업에서 그에 상당하는 직위에 취임함으로써 얻는 사회적 지위봅다 결코 낫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29p
일본은 전쟁의 원인을 다르게 규정했다. 각국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세계에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므로 일본은 계층적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이 질서의 지도자는 물론 일본인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다. 그러므로 저마다 알맞은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32p
미국이 시종일관 물량의 증대에 전력을 기울였다면 일본은 비물질적 수단을 이용하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일본도 미국처럼 생산 증강 운동을 전개해야 했지만 그것은 일본의 독특한 전제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정신은 전부이며 영구 불멸한 것이다. 물질적인 사물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일 뿐 영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라디오 방송에서는 '물적 자원에는 한도가 있다. 물질적인 사물이 영속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료한 일이다'고 종종 방송했다. 35p
일본인이게 있어 명예란, 즉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다.절망적 상황에 몰렸을 때에는 일본군은 최후의 수류탄 하나로 자살을 하든가, 무기 없이 적진에 돌격을 감행하여 집단적 자살을 하든가, 무기 없이 적진에 돌격을 감행하여 집단적 자살을 당한다. 항복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만일 부상을 당했든가 기절하여 포로가 된 경우조차도 '일본에 돌아가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고 여긴다. 명예를 잃었을 뿐 아니라 그런 경우엔 '죽은 자'로 치부된다. 53p
일본인은 어떤 하나의 행동방침에 모든 것을 걸며, 만일 그것이 실패할 경우 다른 방침을 따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57p
일본인을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각자 알맞은 자리매김을 한다.(Take one's proper station.)'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일본인의 견해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다. 질서와 계층제도에 대한 그들의 신뢰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과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우리들로서는 계층제도에 대한 신뢰야말로 인간의 상호관계, 그리고 인간과 국가와의 관계에 관해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가족, 국가, 종교 생활 및 경제생활 등과 같은 그들의 국민적 제도를 열거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들은 그들의 인생관을 이해할 수가 있다. 58p
일본인은 다른 어떤 주권국보다도 그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지도처럼 정밀하게 미리 규정되어 있다. 그것은 각자의 사회적 지위가 정해진 그러한 세계 속에서 생활하도록 교육되었기 때문이다.88p
일본인은 이러한 제도 아래 있으면서 무력적인 계층제도의 지배하에 놓였던 다른 몇몇 나라의 국민들처럼 온화고 순종하는 국민이 되지는 않았다. 각 계급에 어떤 종류의 보장이 주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천민계급일지라도 그 특수한 직업을 독점하는 권리를 보장 받았고, 또 그 자치단체는 당국자의 승인을 받고 이었던 것 것이다. 각 계급에 가해지는 제한은 컸지만, 그 대신 질서와 보장이 따랐던 것이다. 89p
국가는 '각하'들이 각자 '알맞은 위치'에서 직분을 다하면 반드시 그의 특권이 존중될 것으로 믿는다. 그것은 해당된 정책이 시인되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특권의 경계선을 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는 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국정의 최상층에서는 '국민의 여론'은 고려되지 않는다. 정부는 단지 '국민의 지지'만을 요구할 뿐이다.국가가 그 권한의 영역을 지방행정의 범위 내에 투입할 때에도 또한 그 지배권은 황송하게 받아들인다. 갖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는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느끼는 것 같은 불가피한 필요악이 아니다. 일본인에게 국가는 최고의 선인 것이다. 105p
일본인은 그들 스스로가 요구한 것을 다른 나라에 강요할 수는 없었다. 환영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큰 오산이었다. 그들은 '각자 알맞은 자리매김을 하는' 그들의 도덕체계가 다른 어느 나라에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닺. 다른 나라에는 그러한 도덕이 발을 뻗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일본의 유일한 산물이다. 일본의 저술가들은 이 윤리체계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도덕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117p
일본인은 우연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은혜를 입음으로써 보답의 빚을 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그들은 늘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말을 한다. 125p
사소한 일에 관한 이와 같은 신경과민이나 상처받기 쉬운 이런 생각은 미국엑서는 비행 천년의 기록이나 신경병 환자의 병력 기록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것이 미덕이다. 일본인들은 이와 같이 극단적인 짓을 하는 자는 많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극단적인 성격이다. 131p
기무, 즉 의무는 태어남과 동시에 생기는 친밀한 의무의 수행이라고 느껴지는데 비하여 세상에 대한 기리는 계약 관계의 이행이라고 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62p
우리들은 경쟁을 '좋은 일'로 생각하고 자극시켜 기꺼이 도전한다. 심리적 테스트 결과를 보더라도 경쟁은 사람들을 자극시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자극이 강할수록 작업 능률은 향상된다. 우리들의 경우 어떤 일을 혼자서 할 경우 경쟁자가 있는 경우에 달성하는 만큼의 성적을 올리지 못한다. 그런데 일본에서의 테스트 결과는 그 반대의 사실을 낳고 있다. 이러한 일은 특히 소년기가 끝난 뒤의 시기에 현저하다. 일본의 어린이는 경쟁을 장난처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런데 청년이나 성인의 경우에는 경쟁자가 있으면 작업 능률이 뚝 떨어진다. 혼자서 할 때에는 비교적 좋은 진척을 보이고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적다. 183p
일본인은 그와 반대로 예의의 모범 답안이다. 이러한 예의바름은 그들이 오명을 씻어야만 하는 기회를 얼마나 극단적으로 제한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그들응 모욕이 불러일으키는 분노를 성공의 더없는 자극제로 삼고 있지만,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태를 극히 제한하고 있다. 188p
일본인 심성의 특성은 대부분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점과 그것과 표리일체인 불결한 더러움을 기피하는 태도에 기인한다. 그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실제로 우리들은 집안의 명예이든 국가적 긍지이든 간에 모욕을 빧으면 변명으로 완벽하게 씻어 내지 못하면 본래대로 깨끗해지거나 완전히 지유할 수 없는 오점이나 상처로 여기도록 길들여져 왔다. 일본인의 실생활 중에서 빈번하게 만나는 여러 경우의 복수들은 깨끗함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결벽증이 되어 버린 국민이 행하는 아침 목욕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2p
일본인은 작은 실패나 비방, 배척에도 상처를 받는다. 따라서 사소한 일로 타인을 괴롭히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마음을 상하는 쪽을 택한다. 195p
일본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치열한 노력과 단순한 답보 상태인 무기력 사이에서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일본인의 본성이다. 일본인은 지금에 와서는 패전국으로서의 명예를 오호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연랍국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202p
일본인의 영원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 최상의 목표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쓰이는 수단은 사정에 따라 달라지는 도구들일 뿐이다. 사태가 변하면 일본인의 태도는 돌변하여 새로운 진로를 향하여 걸어가게 된다. 일본은 이러한 대도 변경을 서구인처럼 도덕 문제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주의'에 열중하고, 이데올로기의 사항에 관한 신념에 열중한다. 203p
과거의 모든 서구인이 묘사한 일본인 성격의 모순은 자녀 교육법을 보면 납득이 간다. 그것은 일본인 인생관에 그 어떤 측면도 무시할 수가 없는 이원성을 가져다준다. 그들은 유아기의 특권과 마음 편하던 경험에 의하여 그 후 여러 가지 훈련을 받은 뒤에도 다시금 '부끄러움을 몰랐던' 때의 편한 생활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미래에 천국을 그릴 필요가 없다. 그들의 천국은 과거에 있다. 그들이 인간은 본디 선하고, 신은 자애로우며, 일본인으로 태어난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유년시대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335p
그러나 일본인은 스스로에게 많은 요구를 한다. 세상 사람으로부터 배척당하여 비방을 받는 큰 휘협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모처럼 맛본 개인적인 즐거움을 버린다. 그들은 인생의 중대사에있어서는 그런한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 이와 같은 패턴을 윕반하는 소수의 인간들은 스스로에 대한 존경을 상실한다는 위험에 빠진다. 343p
오늘날 일본은 서구적 의미의 '칼을 버리고 항복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런데 일본적인 의미에서는 일본인은 여전히 자칫하면 녹이 슬기 쉬운 마음속의 칼을 녹슬지 않게 하는 일에 마음을 쓰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또덕적인 어법에 의하면 칼은 보다 자유롭고 보다 평화로운 세계에 있어서도 그들이 보존할 수 있는 상징인 것이다.343p
올해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KBS 탐사보도부가 '독립운동의 보이지 않는 적'이었던 밀정을 추적했다. 지난 8개월 동안의 추적이었다. 일본 외무성과 방위성 기밀문서, 헌정자료실에 보관된 각종 서신, 중국 당국이 생산한 공문서 등 5만 장의 문서를 입수해 분석했다. KBS 탐사보도부는 △895명 이름 전체와 △이들 가운데 독립유공자가 된 이는 누군지 △또 이들의 밀고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8월 13일과 20일 방송되는 '밀정 2부작'(밤 10시, KBS1TV)에서 나눠 공개한다.
KBS 시사기획 창 탐사도보 팀이 일본 중국측 자료싹다 찾아가서 뒤져보고 자문까지 구해 8개월여동안 찾은거라함
다음주 까지 방송하는 2부작이고.. 요즘에는 다큐프로그램들 거의다 유튜브에 풀버전 올려놓으니 영상을 직접보셔야 제대로 알수있음
우덕순은 안중근의사의 동지이자 이토히로부미 저격에도 같이 동참했던 인물..공판에서 3년? 형을 선고받도 나중에 나왔지만 그 10년동안 사람이 완전 변해버려서 조선인민회라는 것을 만들어 밀정노릇 제대로하고다님
현재도 현충원에 안장되있음..다만 후손들이 없음 ..
이정은 김좌진장군 의 최측근으로서 수백장의 보고서를 작성해 일제에 독립군동향을 밀고해 협력함.동지들도 팔아넘김
봉오동전투 영화를 보신분이라면 모르겠지만 거기도 최진동이라는 사람이 나오나요?...그사람도 친일파로 변모하는 사람임
방송에 의하면 일본 조선 중국 일대에 퍼트린 밀정만 헤아릴수없이 많다함
일본 외무성 , 조선 총독부, 조선군 사령부(일제 헌병대) 에서 심어놓은 첩자들..또는 회유
심어놓은 밀정이 누군지도 모를정도로 많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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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아직 공개안한 자료들 더 나오면 더 많이 나올거라함..
어쨋든 최소한 현충원에 묻혀있는 배신자들은 좀 빼냅시다 보훈처 일 똑바로하세요..
이번에 보훈처장도 바뀐다면서요?...
아니 어떻게 자기 밀고했던 인물과 바로 옆에 위패를 모셔놓습니까? 에휴
대놓고 친일파도 나쁘지만
이렇게 숨어있으면서 밀정노릇 했던놈들은 ㅡㅡ
친일파 명단에서도 밀정명단은 부록으로 따로 만들어야할듯
그러나 아직도 제대로된 연구사료가 거의없다고 합니다
사진도 찾기 힘들구요
그나마 보고문서와 기록들이라도 있는게 다행이지
KBS 가 이명단 까발렸으니 이제 그 후손들이 어떻게 대처할지 잘모르겠네요
이정의 후손들은 전화 안받는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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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정' 방송 추가 캡쳐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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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곳곳에 심어 놓은 일제의 밀정 공작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서훈까지 받은 밀정들의 암약.. 버젓이 현충원에 안치 서훈 취소해야
정현숙 기사입력 2019/08/21 [09:05]
일제의 집요하고 끊임없는 밀정 포섭.. '임시정부 와해 전략'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가 보기에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암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대한 독립운동의 거목들의 주변에는 늘 밀정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통치를 하는데 눈엣가시였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일제는 임시정부를 파괴하기 위해 곳곳에 밀정을 심어 놓고 갖은 술수를 써 공작을 펼쳤다. 백범 김구 선생이 경무국장을 맡았던 임시정부 조직 안에도 밀정이 있었고, 약산 김원봉 선생의 바로 옆에도 밀정이 붙어 있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항일 무장 독립운동가로 선봉에 섰던 약산 김원봉 선생은 월북 이후 행적 논란으로 서훈을 받지 못했는데 그의 밑에서 의열단이 일으킬 회의 정보와 거사 정보를 일본에 낱낱이 밀고했던 악랄한 밀정 김호는 건국훈장까지 받고 독립유공자가 된 참담한 현실을 보여줬다.
20일 밤 방송된 KBS ‘시사기획 창’ ‘밀정 2부 – 임시정부를 파괴하라’에서는 지난주 1부에 이어 제목 그대로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제가 밀정을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와해 시키기 위한 치밀한 공작을 다뤘다.
1919년, 독립을 향한 조선인의 뜨거운 열망은 상해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 깜짝 놀란 일제는 더 많은 밀정을 투입해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한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독립운동가를 밀정으로 회유하는 전략을 세운다.
그 전략의 선봉에 있던 사람은 1918년부터 2년간 조선군 총사령관을 지낸 '우쓰노미야 다로', 사이토 총독에 이은 2인자로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군 최고 지휘관이다.
우쓰노미야는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밀정으로 포섭하는 전략을 택했다. 대표적 사례가 범재 김규흥이다. 김규흥은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어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까지 받은 인물이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직후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는 김규흥을 다섯 차례 만나 만찬을 함께하며 포섭에 들어간다. 밀정비를 지급하며 마음을 사려 했고, "임시정부를 파괴"하고 "독립운동가를 회유"하라는 임무를 김규흥에게 내린다.
그의 공작 과정은 그가 남긴 일기에 고스란히 적혀있다. 그는 '배일거두(排日巨頭)', 즉 유명 독립운동가를 집으로 불러들여 수차례 밀정으로 회유한다. 노모에게 선물을 사주라며 100엔을 주기도 했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어림잡아도 수백만 원 이상의 거금이다.
김규흥과 우쓰노미야의 이 같은 부적절한 만남은, 우쓰노미야가 남긴 일기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그동안 학계에서도 이를 근거로 김규흥의 친일 논란이 있었다. KBS 탐사보도부는 김규흥이 1919년 말 상해로 돌아간 뒤, 우쓰노미야 사령관에게 실제 두 차례 편지를 보내 상해임시정부 상황을 세세히 보고한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 그의 친필 편지로, 한국에 공개되는 건 처음이다.
김규흥은 편지에서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뜻하는 '일선융화'를 역설했다. 또 상해임시정부의 동향을 보고하고, 거액의 돈을 요청하기도 했다.
"우쓰노미야 사령관 각하에게."
"상해임시정부는 200명이었으나 대부분 귀국하고, 현재 남은 사람은 60명입니다. 이중 극렬분자는 40명에 이릅니다.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선 20~30만 엔이 필요합니다."
"김달하와 함께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북경에 모아서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계책을 갖고 있습니다. 활동비로 김달하에게는 3만 엔, 저에게도 2만 엔을 주시길 바랍니다."
훗날 밀정으로 밝혀져 처단된 '김달하'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밀정 김달하와의 긴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활동이 소문났는지, 자신이 의심받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함께 전한다.
"상해에 있는 단원들로 인해 때때로 강박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밀활동이 드러나 난처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합니다."
김규흥은 편지에서 △상해임시정부의 세력이 점차 위축되고 있다는 점과 이른바 '극렬분자'가 40명 정도로 분류된다는 점, △(훗날 밀정으로 드러나 독립운동 진영에게 처단된) 대표적 밀정 김달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회유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전하고 있다.
상해 일본 총영사관은 끊임없이 밀정을 생산해 내는 이른바 '밀정 공장'이었다. 집요하게 임정 내부에 밀정을 침투시켰고 김구 선생의 경호원까지 밀정으로 포섭했다. 세 차례에 걸쳤던 김구 선생 암살 시도. 모든 공작에 일제는 밀정을 동원했다.
의열단을 조직해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선 약산 김원봉 선생, 1926년 작성된 일본 기밀문서를 보면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함께 한구로 왔고, 김원봉은 북경을 거쳐 광둥으로 향했다."면서 "상해 프랑스 조계 31공학에서 의열단 총회가 개최될 것이다. 참석자는 40~50명이다"라고 적어 사무실 위치는 물론 행적 하나하나 철저히 비밀이었던 의열단의 내부 정보가 밀정에 의해 누출됐다.
문서에 적힌 밀고자는 의열단원 김호, 본명 김재영으로 의열단과 청년동맹회에 참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원봉 선생의 후손은 의열단 동지가 밀정이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김태영/김원봉 선생 후손은 "굉장히 놀랐어요. 밀정이라는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그런 짓인데 기막힌 일이죠, 말이 안 되는 얘기죠."라고 말했다.
요즘 영화 '봉오동 전투'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백두산 호랑이'로 불렸던 명장 홍범도장군도 당시 '봉오동 전투'를 앞두고 결의를 다지고 있을 때 어김없이 일제가 심어 놓은 밀정의 마수가 뻗쳐 있었다. '봉오동 전투'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와 함께 항일 무장 투쟁의 빛나는 금자탑이다.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가 있기 10년 전부터 지속적인 일제의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1912년 작성된 일본 기밀문서, 밀정이 된 홍 장군의 부하가 밀고한 내용이다.
"홍범도는 러시아 말을 타고 있다. 완장에는 붉은색 선 두 줄이 둘러져 있고, 견장은 청색이며 '통령감'이라고 적었으며 "홍범도가 사는 곳은 혜산진 대안 일리에서 약 30리 떨어진 신약수동이다."
한국에 은밀히 파견된 홍범도 부하들의 구체적인 신상정보까지 낱낱이 담겨있어 충격을 주고 있으며 밀정은 독립운동을 와해시키려는 일제의 핵심 전략이었다.
100년 전 당시에는 이 같은 신상정보들이 독립운동가 검거에 긴요한 자료가 됐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일제는 또 홍범도의 부하(원상학, 표창순, 김한보 등)들이 일제강점기 한반도 상황을 은밀히 알아보기 위해 조선으로 침투했다는 사실과, 이들의 신체적 특징까지 파악했다. 일제의 집요한 정보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KBS 탐사보도부가 일본과 중국의 기밀문서 5만장을 장기간 분석한 결과 찾아낸 밀정 혐의자만 895명으로 이들의 이름을 지난 방송에서 공개했다. 앞서 상해 임시정부의 정황을 낱낱이 일본군 사령관에게 밀고한 김규흥과 도산 안중근 의사의 동지 우덕순, 김좌진 장군의 비서 이정, 의열단장 김원봉의 부하로 있으면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김호 등이 현재 독립유공자로 분류돼 현충원에 버젓이 안치되어 충격을 준다.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밀정.. 서훈 취소는?
김규흥과 우덕순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독립운동가였다가 일제에 밀정으로 포섭되어 해방 이후에는 밀정의 기록은 다 지워지고 다시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아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형편이다.
특히 과거에, 그러니까 1960년대의 경우에는 서훈 심사가 더 부실했었고, 친일 청산도 제대로 되기도 전에 한국전쟁을 맞았기 때문에, 이런 사례들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또 2000년대 이후 일본 자료가 더 많이 공개되면서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 알려지게 된 측면도 있다.
이들 밀정 가운데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광복 이후에 사회적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도 적잖이 알려져 있다. 밀정의 경우 첩보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해방 이후 신분세탁을 통해 군과 경찰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은 학계에서도 인정하는 편이다. 그러나 밀정의 특성상 가명을 여러개 쓰고 말 그대로 암약했던 존재기 때문에, 누구라고 특정하기가 쉽진 않아 계속 추적 중이다.
일제가 밀정에게 상당한 액수의 비용을 지급했는데 처음부터 밀정으로 고용돼 고정적으로 월급 받고 일한 밀정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한 사람들로 두 부류로 나뉜다. 어떤 의미에서는 동지로 잠복하면서 변절한 후자의 폐해가 더 크다고 볼 수도 있다.
일본 기밀문서를 보면 이들이 얼마나 치밀했는가를 엿볼 수가 있다. 고용한 밀정이 믿을 만한 사람인가를 계속해서 확인하고, 그렇게 판단될 때 확실한 어조로 해당 정보를 승인해주고 대가를 치르고 있다.
밀정의 정보로 일제가 작전을 벌여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한 대표적 사례로 김좌진 장군의 최측근 비서로 있으면서 밀정으로 암약했던 이정의 밀고 내용을 보면, 독립군의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이홍래 선생이 교묘하게 변장해서 어디어디를 돌아다니면서 어떤 방식으로 돈을 모으고 있다고 세세하게 밀고하고 있다.
이정의 밀고가 있고 나서 한 달 뒤에 이홍래 선생은 일제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밀고했던 이정과, 밀고 대상자였던 이홍래 선생의 위패가 현충원에 나란히 안치돼 있는 씁쓸한 현실이다. 부실한 서훈 심사에 대한 지적이 잇따르면서 가짜 독립유공자를 둘러싼 논란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밀정을 추적하는 것은, 친일청산의 의미로도 읽히면서 서훈 취소로 가야 마땅하다는 여론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훈장을 주는 것보다, 줬던 훈장을 취소하는 게 현실적으로 더 어렵다는 데 있다. 그러나 학계 전문가들은 이번 밀정 취재를 높이 평가하고, 탐사보도부에서 장기간 추적해 확보한 자료가 워낙 구체적이어서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KBS 보도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아직까지는 원론적인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니까 독립유공자들에 대해서 과연 근거가 있는지 조사를 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당초 1차 발표 시점이 7월이었는데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고, 관련 취재를 해보면 난관이 많은 입장이다. 예산, 인력, 전문성, 많은 측면에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보훈처의 적극적인 대처가 더욱 필요해 보이는 시점이다.
1. 우리정부는 이 사태에 관련해서 아무 잘못한 것이 없다. - 문재인 정부는 이에 대해 아주 당당하게 과단성있게 해결해 나가고 있고, 우리는 여기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2. 국민들도 일단 일본을 구조적으로 잘 이해하고, 굳건하게 잘 투쟁해 나가야 한다.
3. 적당히 타협하고 주저앉지 말자 - 좋은 호기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더 큰 비용이 발생하기 전에 확실하게 처리하자. - 일본사람들이 몇 일 하다 그만 둘거라는 말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자
4. 일본사람에 대한 협오는 없다. - 오직 아베정권의 잘못된 리더쉽에 대한 저항을 하고 있을 뿐이다.
5. 일본이 반성할때까지, 일본의 죄악상을 끊임없이 지적해야 한다. - 일본인들이 스스로 그 모든 잘못을 교과서에 실을 때까지. - 이것은 세계사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고, 그러한 세계사적 사명을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걸머지고 있다.
6. 일본에 대한 경제 의존도를 줄인다. - 일본은 이제 리스크로 간주해야 한다. 일본을 믿고 우리 경제를 구축하면 안된다.
7. 아베정권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국민의 태도 ( "NO Japan" ) 유지, 드러나고 있는 친일파를 반민특위 법정에 세우자. - 지금이야 말로 친일파가 드러나고 있는 시기이다. - 이시점이야 말로 반민특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 반민특위의 법정은 내년 총선이다.
1949년 6월 6일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반민특위) 사무실을 경찰이 습격합니다. 제헌국회 산하 반민특위를 경찰이 습격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습격의 지휘자는 서울중부경찰서장 윤기병. 당시 친일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경찰은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로 반민특위를 습격했습니다. 경찰 습격 전까지, 반민특위는 친일혐의를 받던 박흥식, 최린, 김연수, 최남선, 이광수를 포함해 600명이 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검거, 조사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있은지 한 달 후인 1949년 7월 6일,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반민특위는 무력화되고, 친일파들은 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좌절된 친일청산의 여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독립유공자 유족과 독립운동가단체 모임인 사단법인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아래 항단연)은 17일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악질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그를 예방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에게 사죄할 것을 촉구했다.
항단연 회장을 맡고 있는 함세웅 신부(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는 이날 성명을 통해 "황 대표는 광복군 토벌에 앞장선 악질 친일 반민족행위자인 백선엽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는 기괴한 행보를 보여 국민 모두에게 지탄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함 신부는 이어 "정치인은 자신에게 유리하다 싶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정쟁화하는 것이 생리라지만, 한국당 황 대표는 대상을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다"고 비난했다.
그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에 대해선 "일본 군부가 세운 만주국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조직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악질 친일파 중 선봉에 선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또 "자신의 친일행적을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국민들의 신망을 받던 고당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며 친일파를 비호했던 이승만 정권에서 승승장구한 인물"이라며 "만주군관학교 후배인 박정희가 남로당 활동으로 사형선고를 받자 적극적으로 구명했고 그 인연으로 군부독재에 부역하면서 박정희의 실세가 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함 신부는 "황 대표는 나라를 위해 숨져간 독립운동가는 외면한 채 독립군을 학살한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 띄우기에만 혈안이 돼 있다"며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 스러져간 선열들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지금이라도 대국민 앞에 석고대죄하고 친일청산에 남은 일생을 바칠 것을 선언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0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백 예비역 대장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고, 한국전 당시 육군 1사단장, 1군단장, 휴전회담 한국대표 등을 역임했다. 1960년 대장으로 전역한 뒤 외교관과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지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일제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이 부각되면서 논란이 됐다.
아래는 이날 항단연이 발표한 성명 전문이다.
간도특설대 요원 예방(禮訪)하는 정신 나간 자유한국당 황교안대표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고 당대표 사퇴하라!
지난 6일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독립운동역량을 결집시켰고 결과적으로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되었다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반면에 지난 10일 자유한국당 황교안대표는 광복군 토벌에 앞장선 악질 친일 반민족행위자인 백선엽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는 기괴한 행보를 보여 국민 모두에게 지탄을 받고 있다.
정치인은 자신에게 유리하다 싶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정쟁화하는 것이 생리라지만,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대상을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다. 백선엽 그는 누구인가? 일본 군부가 세운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조직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악질 친일파 중 선봉에 선 인물이다.
백선엽은 100년 전 나라를 잃은 국민이 만세운동을 하며 타향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피를 흘릴 때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본의 종이 되어 독립군에 총부리를 겨누었다고 자백하였다.
일본어 자선전에서 백선엽은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라며 <간도특설대> 근무 경력에 대해 아직도 국민들에게 사죄를 않고 있다.
해방 후, 자신의 친일행적을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국민들의 신망을 받던 고당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며 친일파를 비호했던 이승만 정권에서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또한 만주군관학교 후배인 박정희가 남로당 활동으로 사형선고를 받자 적극적으로 구명하였고 그 인연으로 군부독재에 부역하면서 박정희의 실세가 되었다. 민간인 신분으로'선인학원'이란 복마전을 운영하며 온갖 비리와 횡포를 저지른 인간말종의 모습을 보였다. 광복군을 학살한 전범자이자 독립된 조국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재현하며 호가호위하던 범죄자를 독재정권은 무턱대고 비호하였다. 박정희는 전쟁영웅이라는 보기 좋은 허울로 포장하였고, 백선엽은 독재정권을 수호하는 더할 나위없는 하수인이었을 따름이다.
국민들은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이 아직도 민족반역자의 죄명으로 처벌받지 아니한 사실에 의아해 하고 있다. 더 나아가 반역자를 예우한다며 발벗고 찾아나선 공안검사 출신의 거침없는 행보에, 같은 대한민국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항단연은 지난 16일 광복회가 '항일독립정신을 외면하는 것은 반역'이라고 자유한국당 황교안대표를 꾸짖는 성명을 전적으로 공감하고 지지한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국가는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의무가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대표는 나라를 위해 숨져간 독립운동가는 외면한 채 독립군을 학살한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 띄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악질 민족반역자의 우두머리를 정치적 야욕을 위해 머리를 숙였다.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 스러져간 선열들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지금이라도 황교안대표는 대국민 앞에 석고대죄하고 친일청산에 남은 일생을 바칠 것을 선언해야 할 것이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16일 성명을 내어 최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을 예방한 것에 대해 '국가정체성을 부인하는 행위'이자 '항일독립정신을 외면하는것'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7일 제21대 광복회장에 취임한 김 회장은 '항일독립정신을 외면하는 것은 반역'이라는 제목의 성명에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을 되새기는 보훈의 달에 황 대표의 백선엽 예방은 국가정체성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항일독립정신을 외면하는 것은 반역"이라고 하면서 "황 대표는 이런 몰역사적인 행위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백선엽 예비역 대장에 대해 "일제의 독립군 '토벌'에 가장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에서 헌신한 자이며, 윤봉길의사가 처단한 일본군 대장의 이름 '시라카와 요시노리'로 창씨개명한 철저한 토착왜구로 한 번도 일제패망 전의 행위에 대하여 참회한 바도 없다. 그는 지금도 철저한 황국신민이다"라고 준열히 질책했다.
또 "가장 악질적이고, 가장 철저한 친일파인 간도특설대 출신이 영웅대접을 받는 나라에서, 그들의 총칼에 희생되신 독립투사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기막힌 대한민국이 호국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며, 황 대표의 백선엽 예방을 거듭 문제삼았다.
이어 간도특설대는 일제가 조선인을 앞세워 조선독립군을 다스리게 하겠다는 취지로 높은 자리는 일본인으로 하고 조선인으로 구성한 독립군 말살의 주력부대로서 잠입, 파괴, 살인, 방화, 여성독립군 강간 살해 등 그 활동이 악랄한 대표적인 반인륜 범죄조직이며, 주 활동무대인 연변지역에서 이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항일열사는 무려 3,125명이고 그중 85%가 조선인 독립군이라고 지적했다.
1993년 일본에서 출간한 '간도특설대의 비밀'에서 백선엽은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하며, '간도특설대가 (항일독립군)토벌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다고 하여 독립이 빨라졌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회고를 남긴 바 있다.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한 그는 만주군 중위 계급으로 독립군 토벌을 위해 만들어진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다 해방을 맞이했으며, 한국전쟁중에는 제1군단장과 휴전회담 대표,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1960년 전역 후에는 기업가, 외교관 등으로 활동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된 대표적 친일파이다.
황 대표는 약산 김원봉을 언급한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를 비판하면서 지난 10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그를 예방해 "백선엽 장군이 우리 군을 지켜주셨고 오늘에 이르게 된 점이 저희는 명백하게 구분이 되는데 6.25 남침 주범 중의 한 사람인 김원봉이 국군의 뿌리가 된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언급했다.
김 회장은 황 대표가 지난 10일 백선엽을 예방했으나 한 평생 민주화와 평화통일운동에 헌신하다 소천한 고 이희호 여사의 상중이어서 입장발표를 유보해왔다고 덧붙였다.
이번 공연 주관한 저널인 미디어, 사법농단 척결을 위한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 연극도 준비 중
고승은 기자|입력 : 2019/03/30 [12:40]
[저널인미디어 고승은 기자] 올해 2019년은 3.1혁명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이다. 특히 올해가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70년 이상을 분단으로 지낸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가 역대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는 점이다. 70년을 사방이 섬으로 갇혀 살던 한국이 드디어 광활한 대륙으로 달릴,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태극기, 특히 2002년 월드컵 때 전국에서 울려 퍼진 “대~한민국!“ 구호와 함께 흔들던 태극기, 당시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모두 입었던 붉은 티셔츠와 함께 응원도구로 쓰이며 불티나게 팔렸다.
태극기를 거리에서 흔드는 사람들, 몸에 두르고 응원하는 사람들, 또 의상에 활용하는 사람들, 태극기 무늬로 바디페인팅한 사람들. 당시 정말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전까지 '엄숙한' 이미지였던 태극기가 그렇게 대중들에게 친근한 이미지가 됐다. 그 당시엔 참 태극기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2010년경에 접어들어 사람들이 삶에 '희망'을 잃어가기 시작하며, 삼포세대(N포세대)라는 말과 함께 '헬조선'이란 용어가 사회에 유행처럼 자리 잡았다. OECD 국가 중에서 나쁜 수치는 죄다 선두권, 좋아야 할 수치는 죄다 하위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태극기는 자연스레 우리와 점점 멀어져 갔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했던 태극기는 '박근혜 국정농단' 파문 이후로 바닥으로 떨어지며 실추되고 있다. 바로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에서 친박세력들이 태극기를 촛불에 대항하는 도구로 쓰면서다. 엽기적인 국정농단을 일으킨 중범죄자이자, 민주주의를 파탄내고 국격을 바닥으로 추락시킨 박근혜를 상징하는 게 어떻게 태극기라니.
이들은 집회 내내 욕설과 혐오 행동을 쏟아내며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자신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손찌검을 하거나 태극기로 때리는 일이 잦았다. 저들의 과격한 행동으로, 대중들에게 '태극기'는 더욱 혐오스러운 대상이 되며 멀어져만 가고 있다.
<저널인미디어> 는 이런 태극기 되찾기 운동을 벌어고 있다. 그 취지에서 기획한 공연이 있다. 바로 <힘내라 대한민국!> 이다.
29일 금요일 오후 7시,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영등포아트홀에서 <힘내라 대한민국! > 뮤직콘서트가 열렸다. 한반도의 평화와 화합은 물론, 지금 이 시간에도 열정적으로 사는 우리 국민들을 응원하기 위해서다. 이날 참가하신 분들에겐 태극기를 하나씩 나눠 드렸다.
공연에 앞서 사전행사로 사회적공론화미디어가 주관하는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 사진전시회가 열렸다. 공연 1시간 전인 오후 6시에는 영등포아트홀 앞에서 김석환 작가가 캘리그라피 퍼포먼스가 열렸다. 커다란 하얀 천에 삼색 물감으로 태극기를 열정적으로 그렸다. 그의 태극기 퍼포먼스가 끝나자, 21세기 조선의열단 단원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들의 이름을 한자 한자 적었다.
이날 행사 진행은 배우 맹봉학씨가 맡았으며, 1부 행사의 인트로를 설호종씨의 대북 퍼포스로 열었다. 이와 함께 독립투사 관련 영상들도 소개됐다.
이어 5인조 국악밴드인 예인스토리가 ‘새야새야’ ‘독립군가’ ‘오빠생각’ 등을 대금과 아쟁으로 연주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끝으론 소프라노 임청화 교수와 환경운동가 이기영 교수가 함께 노래를 불렀다. 특히 이육사 시인의 시를 새롭게 재조명해 눈길을 끌었다.
이날은 또 특별한 분을 초청했다. 올해로 101세를 맞은 임우철 독립지사다.
임 지사는 최근 나경원 자한당 원내대표가 ‘반민특위 국민분열’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것과 관련, “나경원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역사와 국민 앞에 사과할 것을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이름으로 요구한다”고 꾸짖기도 했다. 임 지사는 부축을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와 관객들에 반갑게 인사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2부 행사는 또 예인스토리가 ‘워낭소리’ ‘신고산타령’ ‘님만나보겠네’ 등을 연주하며 시작됐다. 이들은 특별하고도 흥겨운 사물놀이를 선보였다.
이날 공연의 끝은 록밴드 트랜스픽션이 장식했다. 많이 알려져 있는 월드컵 응원가인 ‘승리의 함성’ ‘승리를 위하여’ 와 히트곡인 ‘너를 원해’ 등 신나는 노래들을 불렀다.
이날 행사의 피날레는 트랜스픽션이 ‘아리랑’을 연주하고, 이날 공연했던 출연진들이 모두 올라와 합창하는 걸로 마무리했다. 객석에 앉아있던 관객들도 모두 일어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아리랑을 함께 불렀다.
<저널인미디어>는 또다른 행사를 준비중이다. 사법농단 척결을 위한 연극공연이다. 제목은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다. 신평 변호사의 저서인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를 토대로 기획한 작품이다.
신 변호사는 사법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판사 재임용 탈락 1호’ 판사다. 그는 판사와 변호사 간의 더러운 금품거래를 목격하고 사법부의 정화를 추구하려고 이를 폭로했다가 재임용 탈락 1호 판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바 있다. 공연은 4월 19일부터 5월 19일까지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3관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참석 법관 105명 중 53명 찬성, 43명 반대, 9명 기권으로 “우리는 법원행정처 관계자가 특정 재판에 관하여 정부 관계자와 재판 진행 방향을 논의하고 의견서 작성 등 자문을 하여준 행위나 일선 재판부에 연락하여 특정한 내용과 방향의 판결을 요구하고 재판 절차 진행에 관하여 의견을 제시한 행위가 징계 절차 외에 탄핵 소추 절차까지 함께 검토되어야 할 중대한 헌법 위반 행위라는 데 대하여 인식을 같이 한다”고 결의하였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 농단 행위와 관련된 법관들에 대하여 사실상 국회의 탄핵소추를 요구하는 결의를 한 것이다.
법관대표회의의 결의는 법관들 스스로 동료 법관들을 심판대에 올리는 초유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는 ‘소장 판사들의 결의에 이제 국회가 답을 해야 할 차례’라며, 탄핵소추 대상으로 거론된 6명의 판사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에 언급된 90여명의 판사 모두 검토 대상이라고 하고 있고, 민주평화당과 정의당 역시 탄핵소추에 찬성입장을 나타냈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고, 바른미래당도 부정적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법원 내부에서는 법관대표회의에 참석하였던 김태규 울산지법 판사가 “법관대표회의에서 이뤄진 법관탄핵 의결은 내용, 절차, 성격 그 어느 것에서도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 다분히 정치적 행위”라고 비판하면서 법관대표회의를 탄핵할 것을 주장하였고, 법관대표회의의 대표성과 구성의 편향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등 내부갈등 양상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법관대표회의의 사실상의 탄핵소추 요구 결의에 대하여는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이를 바라보는 입장이 극명하게 나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는 법관대표회의가 결의한 사법농단 행위 관련 법관에 대한 탄핵 자체가 정치적 성격에서 자유롭지 못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법관에 대한 탄핵은 국회에서 소추하여야 한다. 그런 만큼 탄핵의 과정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합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번 법관대표회의의 결의는 사법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는 가운데 나온 법원 내부의 자정적 노력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법관에 대한 탄핵소추 발의를 둘러싼 정치권의 논란은 사법을 정치의 영역에 끌어들이고, 사법적 판단이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사법부의 독립을 위협할 소지도 있다. 법원은 사법농단 사태가 촉발된 이래 가시적인 자체 해결 능력을 보이지 못하고, 외부에 의존하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독립은 스스로 지키는 것이지 외부의 힘에 의하여 보장되지는 않는다. 이번 법관대표회의의 결의로 인해 정치권의 법관 탄핵소추 논란은 불가피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사법의 정치화 우려가 일어나지 않도록 정치권과 법원 모두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우리 국민들이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만세를 외친 날이죠
2019년 3월 1일은 삼일운동 100주년입니다.
단순히 그 옛날 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하루, '빨간 날' 하루로 넘길 게 아니라
100년 전 그날이 우리의 오늘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생각해보면서
태극기를 게양해보는 건 어떨까요?